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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리노의 말>

영화.음악

by monan.stone 2012. 10. 3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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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즐거운 영화가 있는가 하면, 읽어서 즐거운 영화가 있습니다. '토리노의 말 The Turin Horse'은 분명 읽으며 보았을 때 즐거운 영화입니다. 물론 제한된 공간과 인물로 이야기의 밀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앵글, 사이즈가 느껴진다면 '토리노의 말'은 보면서 즐거운 영화이기도 합니다.


7시간 대작 '사탄탱고 Satantango'로 유명한 헝가리 영화감독 벨라 타르 Béla Tarr가 마지막 작품일 것이라고 공언한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정신착란이 시작된 에피소드에서 출발합니다. 거리에서 한 마부가 도무지 움직이려들지 않는 말을 심하게 채찍질 해대자 니체는 마부를 제지하더니 말을 끌어안고 크게 통곡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니체는 정신착란(혹자는 치매)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간호를 받아 쓸쓸히 죽어갑니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그 마부와 말, 그리고 마부의 딸의 이야기입니다. 니체의 에피소드가 영화 '토리노의 말'과 관련되어지는 것은 서서히 병이 깊어져 죽어가는 그 '느린 퇴행'에 있습니다. 영화는 그 느린 퇴행이 진행되는 6일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황량한 공간 속, 한 손을 쓰지 못하는 마부와 마부의 딸, 그리고 말이 사는 낡은 집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사나운 폭풍 속에서 위태롭기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집 속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부녀는 우물에서 물을 떠오고, 감자를 쪄 먹고, 브랜디를 마시고, 말에게 먹이를 주는 등, 그들에게 주어진,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상을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반복해 갑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지겹도록 반복된 일상은 시간이 갈수록 그 일상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 기계적인 인물들을 서서히 파멸시키게 됩니다. 뭔가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여유마저 없는 이 인물들은 언제부턴가 도저히 움직이려 들지도, 먹으려 들지도 않는 말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제 6일째 남아있던 마지막 불씨마저 꺼지며 암흑이 되었을 때 마부와 마부의 딸은 물론, 세상 또한 파멸되어 버립니다.


처음에 요한계시록이라 생각했던 영화의 구성은 마지막 날 불이 꺼질 때 오히려 창세기의 역행이라는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느낌입니다. 즉, 역사는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서구의 직선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그러한 신념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인간들이 세상의 파멸을 이끈다는 메시지가 역설적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추천하고픈 문구가 있습니다. 이 영화와 비슷하게, 물론 스타일은 판이한, 반복된 일상이 주제인 샹탈 애커만의 영화 '쟌느 딜망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의 평자가 IMDB에 올린 글입니다.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 그 얼마나 지루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 내러티브의 완결성: 10
  • 주제의 깊이: 10
  • 스타일: 9
  • 영상미/조형미: 9
  • 연기: 8


  • 종합: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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